Page 1 of 3
1 copyright Jung Joo Kim all right reserved
신약배경사 강의 노트
전 연세대학교 교수 김정주
제 26 장 유대 후기 총독들
1. 헤롯 아그립바 죽음이후: 헤롯 아그립바가 죽은 후 유대의 최초의 총독으로 임명된 사
람은 바두스입니다. 바두스는 아그립바의 영토 전 지역 통치했으며, 헤롯 대왕 이후로 처음
갈릴리를 유대 영토의 일부로 귀속하였습니다. 바두스는 헤롯 아그립바의 다스림 받는 것을
치욕으로 알았던 가이사랴와 사마리아의 이방인들을 혹독하게 다스렸으며, 데가볼리지역의
이방인과 유대인 거주에 유혈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유대인을 침략자로 정죄한 후 유대인지
도자 중 한 사람을 처형하고, 다른 두 사람을 추방하였습니다. 바두스는 또한 대제사장의
법의를 전례를 따라 안전하게 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글라우디오는 그것이 유대인의 관리
하에 있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바두스 다음으로 총독이 된 사람은 세리장 알렉산더 아들이며 철학자 필로의 조카로서, 애
굽 사람 알렉산드리아의 가장 유명한 유대인 집안의 일원인 알렉산더였습니다.(AD 46년
경). 알렉산더는 유대인의 혈통임에도 유대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알렉산
더가 자신의 배교는 순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두
스의 임기 초기에는 심한 흉년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의 재임 중 주목할 만한 사실은 갈릴
리 사람 유다의 두 아들, 야곱과 시몬 십자가에 처형한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AD 44년 이
후 호전적인 메시아니즘(황야에 근거지 둔 지속적인 반란 운동으로써 메시야를 전한다고 하
면서 반란을 도모함)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2. 아그립바 2세: 알렉산더가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을 그 무렵(AD48) 갈기스의 왕이
요 이미 작고한 아그립바이 형제인 헤롯이 죽었습니다. 아그립바의 죽음 이후 헤롯이 대제
사장 임명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헤롯이 죽자 이 권한은 아들 아그립바(아그립바2
세)에게로 이관되었습니다. 또한 아그립바 2세는 글라우디오에 의해 헤롯의 갈기스 왕국도
받게 되었으며, AD 53년 아빌레네와 빌립의 4분령을 차지하기 위해 갈기스 포기하게 되었
습니다. 그리고 네로 황제 이후,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아그립바 2세는 유대인의 대
의에 대한 애국적 봉사와 로마 정부에 대한 충성을 잘 결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처럼 그는 자신을 ‘대왕, 신실한 가이사의 친구, 로마의 친구’라고 자칭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행 26:3)라는 바울의 증언을 얻게 되
었으며, 유대 총독 쿠마누스와의 영토 분쟁에서는 유대인의 편에 서서 개입하였습니다. 아
그립바는 또한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 보수하고, 레위인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일도 하였습니
다. 3. 아그립바 2세 재위 중의 총독들은 쿠마누스, 벨릭스, 베스도, 알바누스, 플로루스가 있
습니다. 쿠마누스는 유대인과의 계속적인 분쟁으로 임기 마치지 못하고 해임, 추방당했습니
다.
Page 2 of 3
2 copyright Jung Joo Kim all right reserved
쿠마누스 다음으로 유대총독이 된 사람은 벨릭스입니다. 벨릭스는 노예 출신으로써 귀족가
문과 결혼한 쿠마누스가 임명한 재판관 중 하나였습니다. 전직 대제사장 요나단이 로마에
갔을 때 벨릭스의 품행에 크게 감명을 받아 글라우디오에게 부탁하여 그를 유대의 총독으로
쿠마누스의 뒤를 잇도록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벨릭스가 유대인 총독 된 것을 기뻐하였던
유대인들은 얼마 못 가서 그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벨릭스는 총독이 된 후, 열심당이나
다른 반란 행위 철저하게 진압하였기 때문입니다. 타키투스는 그의 성품에 대하여 신랄하게
말하기를, ‘모든 형태의 잔인과 정욕에 탐닉하여 노예 근성을 가지고 왕의 세도를 행사하였
다’고 했습니다. 벨릭스는 그의 성품과 같이 유대인과 가이사랴 헬라 집단 사이의 분쟁에
격렬하게 개입하였고, 이것이 그가 해임당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벨릭스 다음으로 유대총독이 된 베스도는 전임자들보다 원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벨
릭스의 과격한 행동이 유발하여 일어난 로마 정부에 반항하는 계속적인 반란을 효과적으로
제지할 능력이 없었으며, 또 그들을 제압하려는 그의 군사적인 실력 행사에도 불구하고 끊
임없이 급증하는 자객들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주요사건으로는 아그립바 2세와 성전 지
도자들 사이의 분쟁을 들 수 있습니다. 하스모니안의 전 궁전이었던 아그립바의 별장이 예
루살렘에 있었는데, 그것은 티로포에온 골짜기 서쪽 벼랑에 서 있었으며 그곳에서는 그 골
짜기의 다른 쪽에 위치한 성전이 바라다보였습니다. 아그립바는 그 궁전에 해바라기를 할
수 있는 휴게실을 지었는데, 그가 식사를 할 때면 맞은 편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드리는
광경을 바라다볼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것이 싫었고, 성전 책임자들이 아그립바의
눈에 안 보이도록 담을 쌓았을 뿐 아니라, 축제 때면 로마 병정들이 공공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외궁 서쪽에 위치한 열주의 꼭대기로부터의 조망대에서도 보이지 않도록 담을 쌓아
버렸습니다. 아그립바와 베스도는 다 같이 그 담 쌓는 것을 반대하였고 그 담을 헐어버리라
고 명령하였습니다. 이에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제사장 이스마엘과 성전의 재무 책임자 힐기
야가 인솔하는 대표 10명을 네로에게 파송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이라고 불리었던
네로의 아내 사비나로 하여금 네로를 설득시켜 그 문제의 벽을 그대로 남아 있게 하였습니
다. 베스도는 AD 62년 재임 중 죽었으며, 3개월 간의 총독교체 공백 기간 중에 의인 야고보가
대제사장 안나스 2세의 부당한 법적 재판을 받고 처형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새로 부임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는 길에 들은 알비누스는 몹시 분노하여, 급히
사자를 보내어 총독에게만 부여된 사법권의 특권에 대하여 그런 월권 행위를 한 안나스와
그를 동조한 사람들을 엄중히 처벌하겠다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에 사태의 중대성을 직감
한 아그립바는 안나스를 즉각 그의 공직에서 해임함으로써 알비누스와의 사이에 화해를 꾀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알비누스는 살인자들을 준엄하게 다스렸습니다. 이 밖에도 알비
누스는 중 죄수 제외 모두 석방하는 관대한 특사를 행하였으며, 이것은 일종의 뇌물공세라
는 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알비누스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헤롯에 의하여 80년간 계속 되
어오던 성전 복구 공사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동안 성전 공사에 종사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을 갑자기 실업자가 되게 하였던 것으로, 참으로 원치 않은 불안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알비누스는 제사장과 레위인 사이의 분쟁사이에서 레위인의 위치를 높이는 일
도 하였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가 성전 성가대들도 제사장들과 같은 린네르 예복을 입
도록 허락할 것과 조상 때부터 성전의 다른 잡부에 종사하던 레위인들도 성전 성가대와 동